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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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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 56- 다시 배우는 주님의 기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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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히 축복을 청하자
 
 
좀 과한 말이 될지 모르겠으나, 천주교 신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기복기도'가 아니라 '기복기도 노이로제'가 아닐까 한다. 정말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예를 들면 자녀들이 대입 수험을 앞두고 있을 때, 남편이 승진의 기로에 있을 때, 사업을 막 시작했을 때 등등의 경우에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은 그 문제를 당당하게 기도제목으로 삼지 못하고 주변 눈치를 살피는 듯하다. 혹시 누가 '기복기도' 한다고 핀잔을 줄까봐서이다.

필자는 사목자들이 신자들에게 "기복기도 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하는 것을 예사로 봐왔다. 그 취지인즉슨, 해야 할 윤리적-영성적 도리는 안 하면서 미신적으로 복만 빌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신자들은 그 말을 "세속적인 일을 위해서는 아예 기도하지 말라"는 말로 소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살다가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 개신교 신자의 약 70%는 교회에 가서 기도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만, 천주교 신자 가운데는 성당을 찾아와 기도 요청을 하는 사람이 30%도 채 안 된다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기복기도(祈福祈禱)를 글자 그대로 풀면 '복을 구하는 기도'가 된다. 복을 구하는 것이 과연 잘못인가? 아니다. 성서는 온통 축복의 약속으로 채워져 있고, 축복을 청하는 기도로 가득하다.

신자들이 기도를 잘 하도록 지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무턱대고 신자들이 '기복기도 노이로제'에 걸려 힘있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은 더 큰 문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새해벽두에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축복을 빌어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

이 축복의 내용을 음미해 보면 핵심적인 것은 액땜, 만사형통, 평강이다. 흔히 '기복기도'를 한다고 경고 받을 소지가 있는 기도 제목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 가운데 사람에 대한 4가지 청원을 우리는 추상화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다시 '주님의 기도'로 돌아가 그 가운데 사람에 대한 청원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양식'이란 우리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한다. 매일 매일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기를 '아빠'에게 청하는 기도다. 이는 먹을 것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도의 핵심은 바로 '오늘'에 있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서는 '내일', 혹은 더 먼 미래의 양식까지 한꺼번에 주실 수 있는 분께 '오늘' 필요한 것을 주시기를 청하라고 말씀하신 걸까? 그것은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매일 그분께 의지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라는 뜻이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교훈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민수 11장). 배부르면 딴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그때그때 하느님께 필요한 것을 청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도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바라는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성서는 "우리가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야고 4,2-3).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기도는 우리가 자주 범하는 구체적인 죄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며 우리도 남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하겠다는 결심을 아뢰는 기도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겠으니, 하느님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하기를 청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결과'다. 형제에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1-22)고 말씀하시며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를 들어 말씀해 주신다. 이 무자비한 종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먼저 받은 사람들이다. 그 용서는 우리 죄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으신 무조건적 용서였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큰 용서의 빚을 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능력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문의 참 뜻은 이미 용서받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용서를 취하할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마태 18,35 참조).

다음으로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온갖 유혹을 사람의 힘만으로는 물리칠 수 없기에 하느님의 '보호'와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바친다.

유혹을 물리칠 능력을 주님께 청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다와 베드로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는 스스로 그 굴레에서 벗어 나오려 하다가 결국 자살했고(마태 27,3-10 참조),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배반한 베드로는 똑같이 유혹에 빠졌지만, 주님께 의탁함으로써 유혹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마르 14,72 참조). 우리는 매일매일 이 기도를 바침으로써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악에서 구하소서"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와 연결지어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는 유혹 근처(1m 근방)에도 가지 말게 해 달라는 것을 뜻하고, "악에서 구하소서"는 만일 유혹에 빠지게 되거든 그 악을 물리치고 빠져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악의 세력'과 싸움에서 속아 넘어가거나, 굴복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기도다. 이는 또한 궁극적으로 마지막 때에 있을 악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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