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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가톨릭 일반상식과 간단한 교리를 담는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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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 70<끝>-아시아 선교 시대를 꿈꾸며
name 운영자 (ip:)
grade 0점
  뜨거운 선교 사명 품고 하늘 뜻따라
 
 
 평화방송 TV 특강 '여기에 물이 있다' 지상(紙上)해설을 쓰기 시작한 지 어언 1년 반이 흘렀다.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셨다. 첫호부터 스크랩을 하고 있다며 격려를 주시는 애독자들을 만날 때마다 집필을 주관해 주신 성령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제 맺는 글을 써야할 때가 됐다. 막 방학을 앞둔 학생 심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자니 무엇보다도 '감사'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긴 기간 집필 기회를 준 평화신문에 첫번째 감사를 드린다. 매회 꼬박 챙겨서 읽어주신 애독자분들께도 고개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토막 시간을 이용해 원고를 쓸 때마다 영감을 불어넣어 주신 성삼(聖三)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  

뜬금없어 보일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이 마지막 지면을 무명 증거자 송해붕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는 데에 할애하고 싶다. 그분의 불타는 선교영성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분을 인천교구 고촌성당에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알게 됐다. 그 전신인 고촌공소를 세운 분이 바로 이 분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재임하던 약 2년 동안 필자는 그분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6ㆍ25때 무명으로 순교한 경위를 소상히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발령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김포시 양촌면 소재 누산리공소에 연구소 터를 잡고 연구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달쯤 지났을 무렵, 그곳 신자에게서 누산리공소가 증거자 송해붕 세례자 요한께서 고촌공소에서처럼 동시에 교리를 가르쳤던 곳이며 순교 직전 피신해 지냈던 곳이라는 사실을 듣게 됐다. 이는 고촌성당에서는 전혀 듣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한번의 인연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그것도 증거자 생존시 공을 들였던 두 장소에 부임하게 된 사실에서 필자는 어떤 보이지 않는 하느님 섭리를 느낀다. 곧 증거자가 가슴에 품었던 전교열심을 대물림하라는 어떤 깊은 뜻이 서려 있는 듯, 소명감을 갖게 된 것이다.

꼭 지어낸 이야기 같지만 그분과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새롭게 지을 연구소 자리를 물색하던 과정에서 그분 순교지가 기묘한 인연을 통해 매물(賣物)로 나와 구입하게 되는 기적을 만난다. 지면 관계상 소상히 적을 수는 없으나, 그 당시 전후 상황을 종합하건대 이는 영락없는 송해붕 세례자 요한의 전구(轉求) 덕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의 전기 「스물넷, 못다 사른 불꽃」(구입문의:031-985-5677)에 실려 있다.

송해붕 세례자 요한은 1926년 경기도 부천구 계양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모태 신앙을 갖고 태어났다. 그분은 1944년 4월 덕원신학교에 편입해 신학생 생활을 하던 중 1945년 해방 이후 사제가 되기 위한 학업 과정을 중도에 포기하고 고촌 은행정 마을로 들어가 야학을 운영하며 전교 활동을 벌인다. 이후 몇 년간 은행정과 누산리공소를 오가며 펼친 전교 활동은 가히 성인 수준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분의 신앙과 열정과 수고는 가는 곳마다 청년이고 어른이고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제자가 되도록 변화시켰다.

그러나 청년 송해붕은 1950년 6ㆍ25 전쟁 당시 천주교가 동네에 전파되는 데 반감을 가진 주민 일가의 밀고로 빨갱이로 몰려 총살형을 당하고 만다. 그분 죽음은 신앙 전파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분 죽음은 순교였다.

나중에 그분 유해를 발굴할 때, 그분 시체와 함께 있던 널판지에는 장미 넝쿨이 우거져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사람이 확인했다고 한다. 그분 유해는 현재 고촌성당 터에 안치돼 있다.

그분은 생전에 전교에 힘썼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항상 전교를 강조했다. 다음은 그분이 몸소 괘도에 적어 교우들에게 가르치던 '좌우명 십계' 가운데 하나다.

"보통의 열성은 보통의 일밖에 못한다. 봉건 사상에 젖고 유도사상(儒道思想)에 박히고 미신 숭상에 젖은 삼천리 강산의 동포 무리를 진리의 성령으로 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보통이 아닌 초자연적 열성과 둘째, 예수 성심에 취한 열성으로 피눈물의 희생과 고통을 극복하는 정신이어야 한다."

그분은 가슴에 '삼천리 강산의 동포 무리'를 품고 있었다. 만일 그분이 이 시대에 살아 계신다면 필경 그분은 아시아 선교, 나아가 세계 선교를 꿈꾸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분을 기억할 때마다 필자 가슴에서 이런 선교 비전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낀다.

송해붕 세례자 요한, 그분은 죽었지만 살아 있다. 오늘도 하늘에서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전구하고 계신다. 그분은 지금 한국천주교회가 아시아와 세계를 향해 사명감을 가져 주기를 간곡히 원하며 기도해 주신다.

최근 또 하나 의미 있는 만남이 있었다. 세계적 가톨릭 복음전도자 다니엘 개그너 신부와 만남이었다. 지난 6월초 필자에게 난데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다니엘 개그너 신부가 통역을 맡은 한국인 자매님을 통해 필자를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준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필자는 하느님 섭리다 싶어서 '숙소가 어디냐'고 물었다. 서로 정해진 일정 때문에 밤 늦게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자매님은 숙소가 성 라자로 마을이라고 알려 주었다. 얼마나 오묘한 일인가? 마침 그때 필자는 피정 강의를 하러 성 라자로 마을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둘은 곧바로 만날 수 있었다. 필자는 "왜 저와 만나기를 원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개그너 신부는 자신이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로 한국천주교회가 아시아와 세계 교회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점점 확신해 오고 있던 터에 한국에 오게 되었는데, 순회강연을 하던 곳곳에서 필자의 선교 비전에 대해 듣게 돼 필자를 꼭 만나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해 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둘은 핵심적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필자와 개그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가 아시아와 세계 선교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영적 예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로 고무됐다. 구체적 비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개그너 신부는 매우 영성적이며 지혜로운 답변을 해줬다. 구름의 움직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이 시대에도 구름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관찰해야 한다. 맑은 영적 눈으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감지하고 순명의 마음으로 따라야 한다. '준비하라' 명하시면 준비하고, '가라' 명하시면 가고, '멈추라' 명하시면 멈춰야 한다.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밤에는 그것이 불 모양으로 변하였다. 구름이 천막에서 올라갈 때마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을 떠나고 구름이 내려앉은 곳에 진을 쳤다"(민수 9,16-17).

다시 한번 평화신문 애독자들에게 감사드리며, 모두가 아시아 선교 시대를 내다보며 뜨거운 선교사명을 가슴에 품고 구름 따라 신앙 여정을 기쁘게 밟으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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