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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7) 믿음이 성장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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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7) 믿음이 성장하려면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 신부는 신자들에게서 믿음을 배운다

작년 하반기쯤 삼성산 성지에서 특강을 했을 때 일이다. 한 형제가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다른 형제를 가리키면서 내게 말했다.

“신부님, 저 형제가요 믿음이 대단합니다.”

“???”

“암에 걸렸었는데, 기도로만 나았답니다. 병원치료 시기를 놓쳐서, 항암치료도 약물치료도 없이, 기도에만 매달려서 나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감사를 돌려드리려고 봉사를 한답니다.”

“야-아, 대단하네요. 할렐루야, 아멘!”

나는 신나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형제가 자꾸 생각났다. 장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근데, 그 암이 어떻게 없어졌던 것일까? 거 참 희한한 일일세…….”

정직하게 말해서 신자들의 믿음이 신부의 믿음보다 훨씬 독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특히나 생존형 믿음에 있어서는 신자들의 믿음이 훨씬 집요하고 끈질긴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신부나 수도자들은 시쳇말로 ‘철밥통’이라 말할 수 있다. 아무리 경기가 바닥을 칠 때도 신부들은 생계문제로 고통을 겪지 않는다. 그런데 절박한 기도는 생계곤란의 상황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이것이 신자들이 더 다이내믹한 신앙체험을 하게 되는 이유다.

또 하나! 가끔은 수준 높은 신학이 단순한 신앙을 갖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이것저것 따지고 거르다 보면, 정작 죽기 살기로 매달려도 시원찮을 기도가 다 거세되어 힘이 빠지기 십상이다. 게다가 정확하게 개념정의가 되어 있지도 않은 말인 ‘기복기도’ 금지를 강조하는 입장이 되고 보면, 기도는 이제 세상사와 담쌓은 ‘이슬기도’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져둔다.

“오늘 우리가 세워놓은 기도지침을 기준으로 삼으면 구약의 인물들은 모두 경고 대상 아닐까. 그러니 기도에 대해서는 오히려 신부인 내가 신자들에게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해.”


■ 믿음이 성장하려면

지난주에 사도신경의 ‘나는 믿나이다’에 대해서 짚어봤다. 그러면서 그 믿음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우리들의 생활 현장임을 확인했다.

이제 믿음의 성장에 대해서 성경의 지혜를 배워보자.

어떻게 해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을까? 바오로 사도는 자꾸 들을 것을 권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성경을 읽고, 신앙체험담을 반복해서 들으면 믿음이 절로 생긴다.

“아, 극적으로 주님이 역사하시는구나. 죽은 자도 살려내시는구나. 망한 자도 일으켜 세우시고, 끝난 사람도 새로운 시작을 주시는구나. 와, 원더풀! 할렐루야, 아멘!”

믿음의 성장은 특히 말씀을 듣다가 ‘나’를 위해 건네시는 주님 말씀인 ‘레마’를 만남으로 촉진된다. 나는 여러 저술에서 주님께서 각자에게 ‘레마’를 주심을 누차 강조했다. 성경에 있는 객관적인 진술을 ‘로고스’(logos)라 한다면, 이것이 주님이 나만을 위해서 속삭여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질 때 ‘레마’(rema)라 한다. 이에 대해 간혹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설마 나한테까지?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나한테만 따로 말씀을 주시겠어?”

사실 그 많은 사람을 일대일로 상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만 해도 그렇다. 강의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헤아려 주기 쉽지 않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각자의 이름도 모르고 사정도 모르니 어차피 한계가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인류 전체를 통째로 상대하지 않으신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씩을 상대하시어 ‘나’를 위해서만 따로 말씀을 준비하신다. 이것이 주님 사랑이다. 주님의 사랑은 구체적이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데레사, 내가 너 사랑해. 마리아, 내가 너 사랑해. 요한, 내가 너 사랑해…”라고 말씀하신다. 일대일 사랑이다. 그러니 성경을 읽다가 감동이 오는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을 붙들고 힘내서 살 일이다. 그게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만 건네시는 레마며, 그것이 ‘나’의 삶에서 그대로 현실이 될 것을 확신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결국, 말씀을 들음으로, 레마를 철석같이 받아들임으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다.

나는 그 증인들을 숱하게 알고 있다. 내가 회원제로 보내드리는 〈신나는 복음 묵상>의 피드백들은 신자들이 어떻게 말씀으로 양육되는지를 흥겹게 말해주고 있다. 요컨대, 복음을 반복해서 읽고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은 쑥쑥 자라난다.


■ 믿음을 성장시키는 복음 속 이야기들

복음서에는 믿음의 모범들이 즐비하다.

먼저 ‘중풍병자’ 이야기를 보자.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병든 친구를 예수님께 보여드려 낫게 하고 싶었지만 군중 때문에 어렵게 되자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병든 친구를 예수님이 앉아 계신 곳으로 내려 보낸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르 2,5) 크게 감탄하셨다. 사실 예수님이 윤리 선생이면 얘긴 전혀 딴 판이 되었을 것이다. 차례 안 지켰지, 남의 집 지붕 뚫었지. 그런데 예수님은 그 차원이 아니시다. 사람을 헤아리는 그분의 측은지심은 그런 걸 문제 삼지 않으시고, 오히려 “얼마나 딱하면 이렇게까지 데려 왔을까” 하는 마음으로 병든 친구를 데려온 이들을 이렇게 칭찬하셨던 거다. “너희들이 정말로 내가 낫게 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구나. 그러니까 이 법석을 떨고 여기까지 온 거구나.”

또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녀는 병든 딸을 살리겠다는 일념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강아지’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면서도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라며 물러서지 않는다. 그 여인은 이방인이고,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나는 유다인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왔지, 이방인들을 위해 오지 않았다”라고 하셨던 거다. 그런데 굴복을 모르는 믿음으로 간청한 이 여인의 적극성이 예수님께 어필하였다. 마침내 예수님은 크게 놀라며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셨다.

끝으로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의 예는 더하다. 그는 중병으로 누워 있는 자기 종을 치유해 달라고 청하면서, 예수님께서 미천한 자기 집까지 오실 필요 없이 “그저 말씀만”(루카 7,7) 하시면 종이 낫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고 크게 감탄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예수님은 우리 ‘과장된 믿음’에 절대로 재를 뿌리거나, 찬물을 끼얹지 않으셨다. 없는 믿음은 야단을 맞아도 ‘오버하는’ 믿음은 야단을 맞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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