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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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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8) 전능하신 아빠
name 운영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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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아빠 하느님은 우리의 최대 자산이며 최고의 인맥



■ 아빠 불러도 돼요?

최근 <희망의 귀환>이라는 주제로 평화방송 TV특강 녹화를 뜨고 있다. 기왕이면 젊은이들을 향한 강의였으면 좋겠다는 PD의 제안을 받아들여 방청객들을 20~30대로 모집했다. 강의가 무르익어갈 즈음, 젊은이들이 나를 감동시켰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자산’을 잘만 깨달아도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대목에서 나는 그들에게 우리의 ‘자산’으로 물적 자산, 지적 자산, 영적 자산을 꼽아주었다. 그런데 그들 요즘 젊은이들은 영적인 것을 기피할지도 모르겠다는 나의 편견을 보기 좋게 허물어뜨렸다. 피드백을 듣는 시간에 그들은 그 가운데 ‘영적 자산’에 대한 내용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고 이구동성으로 실토했다!

“우리에게는 어떤 시련의 상황에서도 기도하고 도움을 청할 하느님이 계시다. 하느님이 우리의 최대 자산이며 최고의 인맥이다!” 고맙게도 젊은이들은 이런 믿음을 당당하게 입술로 고백해 주었다. 얼마나 흥분되는 얘기인가. 젊은이들이 이처럼 기특한 믿음을 갖고 있다니.

내가 이토록 기뻐하고 있는 까닭은 요즘 결손 가정이 점점 많아져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 형성이 예전보다 녹록지 않다는 현실인식 때문이다. ‘아빠’의 든든한 존재감을 온전히 누리면서 자란 아이들이 그러지 못한 아이들보다 더 잘 하느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끔 마련인데, 이 시대 가정문화는 그 반대로 치닫고 있으니 말이다.

미 NBC TV의 명 앵커였던 팀 루서트는 자신의 저술 「아버지의 지혜」에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어떻게 하느님 신앙을 굳건히 해주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내가 어린아이일 때 아버지가 나를 침대로 데리고 갈 때면 침대가 늘 차가웠다. 특히 시트가 그랬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기 이불로 내 발을 따뜻하게 덮어주셨다. 아버지가 잘 자라는 키스를 하기 전에 나는 늘 아버지에게 열 개도 넘는 질문을 하곤 했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아빠 불러도 돼요?’

‘너무 더우면 아빠 불러도 돼요?’

‘너무 추우면 아빠 불러도 돼요?’

‘무서우면 아빠 불러도 돼요?’

‘배고프면 아빠 불러도 돼요?’

내 질문에 아버지는 늘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그럼!’

그제야 나는 내가 사랑을 받고 또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다는 생각을 하며 편안하게 잠들곤 했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과 항상 함께 있는, 따뜻한 보호자로 그려진다. 이처럼 우리도 “아빠!” 하고 부르면,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시어, 자상한 말투로 대답하신다. “그럼, 그럼, 그럼.”


■ ‘천주’를 믿나이다

사도신경에서 ‘나는 믿나이다’의 대상은 우리말 번역에서는 ‘천주’로 번역되고 있는 Deum 곧 ‘하느님’이다. 여기서 주의를 요하는 것은 라틴어 원문에서 ‘천주’ 바로 다음에 ‘전능하신 성부’가 동격으로 따라붙었는데,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를 버무려서 ‘전능하신 천주 성부’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그 뜻을 확실히 배우기 위하여 라틴어 원문 순서를 따르기로 한다.

이제 ‘천주’(Deum) 곧 하느님에 초점을 맞춰보자. “하느님을 믿나이다”라는 이 신앙고백은 신앙의 근본이며 출발점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고백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 하느님의 유일성을 강조하여 상기시키셨다(마르 10,17-18 참조). 그러기에 사도신경의 첫째 항목인 “하느님을 믿나이다”는 의당 이방인들의 다신 신앙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결단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앞에서 언급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안에서는 ‘한 분이신’(unum)이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첨가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으며’(Credo in unum Deum)라고 되어 있다. 한 분 하느님을 믿는 것을 명확하게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요즈음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한 분’ 하느님을 믿는 게 아니라 여러 하느님을 믿도록 손짓하는 유혹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원주의 신앙, 뉴에이지, 잡신신앙 등등.


■ 전능하신 성부를 믿나이다

“하느님을 믿나이다” 다음에 나오는 문구는 ‘전능하신 성부’ 곧 ‘파트렘 옴니포텐템’(Patrem omnipotentem)이다. 이 동격 서술어의 쓰임새는 앞의 ‘천주’를 설명하는 기능이다. “자, 그러면 그 천주님이 어떤 분이냐? 바로 전능하신 아버지시다!”하는 식으로 말이다. 왜 ‘아버지’라고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전능하신’에 초점을 맞춰보자.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유일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만방에 떨치기 위해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하나가 엘로힘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엘로힘’(Elohim)이라 불렀다. 엘로힘은 흔히 ‘신’을 가리키는 고대 셈어 ‘엘’(El)의 복수형으로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가리키는 복수형 단수 명사로 사용되었다. 즉, ‘신들의 신’, ‘으뜸신’, ‘최고의 신’이란 뜻이다.

모세는 자신을 보낸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Yahwe)였다고 파라오 왕에게 선포하였다. 야훼는 ‘있다’는 의미를 넘어 ‘힘찬’ 존재, 곧 ‘살아서 자신의 의지대로 활동하는’ 존재를 뜻한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 전해 주는 표현이 자유자재(自由自在)라는 한자어다. 따라서 ‘야훼’라는 하느님 호칭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나는 자유자재, 곧 스스로 말미암아 있고 싶은 대로 있고 행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자니라”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야훼께서 이집트 종살이에서 자신들을 해방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데려다 주셨다고 믿고 있다. 바로 이 야훼 하느님이 우리가 믿고 있는 성부 하느님이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추상적인 개념을 멀리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이라 붙인 것은 냉혹한 삶의 고비에서 당신 오른 팔로 권능을 휘두르시어 자신들을 구해준 하느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야훼’라고 이름 붙인 것은 어떤 세상의 권력도 거뜬하게 주무르시고, 어떤 자연의 극한도 자유자재로 제어하시는 하느님 체험에서 나온 신앙고백이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은 남의 체험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에 기반을 둔 고백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저는 믿나이다’는 지난날 우리 신앙의 반성이며, 오늘 우리 신앙의 활로이며, 내일 우리 신앙의 희망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치 어린 아이가 친구들에게 아빠를 자랑하듯이 우리들의 어깨도 절로 으쓱하지 않을까.

“너네, 우리 아빠가 누군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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