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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9) 돌베개에서 만난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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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9) 돌베개에서 만난 하느님

극한 상황일 때 주님은 더욱 우리와 함께하신다



■ 내가 몰랐구나!

내가 성경에서 가장 즐겨 읽는 구절 가운데 하나가 야곱이 형 에사우의 장자권을 노리다가 미움을 사고 쫓겨나는 대목이다. 읽을 때마다 전혀 새롭게 접하는 통쾌한 반전과 번쩍이는 깨달음은 성경을 읽는 재미의 으뜸이라 할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야곱이 “이놈 잡히면 죽음이다!”라고 이를 갈던 에사우에게서 도망쳐 어머니의 권유를 따라 외삼촌 라반에게로 도피하는 장면만 클로즈업해 보자.

길은 멀다. 장장 350km.

얼마쯤 왔을까. 야곱은 ‘베델’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데 꿈에 사다리가 나타나고 거기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며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잠에서 깬 야곱은 말한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16-17).

여기서 잠깐, 당시 상황을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하자.

우선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잤다고 했다. ‘돌베개’는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이 아무리 없이 여행을 다녀도 옷 보따리에다가 비상식량은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잘 때는 그것을 베고 잔다. 돌베개는 야곱에게 그것조차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야곱이 얼마나 급하게 줄행랑을 쳤으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도망쳤을까. 불같은 형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았던 것이다. 잡히면 죽는 것이다. 이를 알고 바로 튀다시피 해서 여기까지 와 보니 축복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축복은 나중 일이고 살아남는 일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기도를 못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아무데서나 기도를 할 수 없었다. 성소나 서낭당 등 이런 공간이 따로 필요했다. 그런 와중에 야곱은 불안에 떨면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잤던 것이다. 그런데 야훼 하느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신다. 야곱은 비로소 깨닫는다.

“여기 야훼께서 계셨는데 내가 몰랐구나!”

이것이 영성이다. 돌베개를 베고 자는 상황은 우리에게도 수도 없이 발생한다. ‘의지가지’ 하나 없는 상황, 같이 사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상황이 언제고 생기게 마련이다. “이거 돌베개구나…. 내가 의지할 것은 돌멩이 하나구나!”

그런데 바로 그때가 “여기 야훼께서 계셨는데!”를 고백하는 때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그게 언제겠는가? 우리가 잘나갈 때인가, 아무 문제없을 때인가? 극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분은 더더욱 우리와 함께 계신다. 힘들 때, 외로울 때, 절망할 때, 그 순간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시는 때라는 것을 확신하자. 그리고 그 순간, “여기 야훼께서 계셨는데!” 하고 고백하자.

이렇게 야곱이 베델에서 만난 하느님은 바로 다음에 다루어질 전능하신 하느님이 지니는 속성들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고 있다. 함께 확인해 보기로 하자.


■ 전능하신 (천주 성부)

지난주의 주제 ‘전능하신 천주 성부’에 이어, 이제 조금 더 관심을 모아 ‘전능하신’에 초점을 맞춰보자.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옴니포텐템’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이라는 뜻의 ‘옴니포텐스’(omnipotens)의 격변화다. 이 단어는 하느님이 하늘과 땅의 통치자요 주권자이심을 드러낸다.

전통적으로 ‘전능하신’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모든 속성을 총괄적으로 표현해 주는 의미로서, 영원(永遠), 전지(全知), 편재(遍在), 정의(正義), 전선(全善), 이렇게 다섯 가지를 내포한다.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전능하신’은 첫째로, 하느님의 ‘영원하심’을 내포한다.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말씀이 “당신은 언제나 같으신 분 당신의 햇수는 끝이 없습니다”(시편 102,28)라는 시편 구절이다. 여기에는 ‘주님은 시간의 왕이자 주인’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우리를 만들어 주신 분이 영원하시기에, 유한한 존재인 우리도 영원을 동경하고 마침내 영원을 누리게 되었다. 이 영원하신 분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시기에, 우리는 비록 고통 중에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는다. 주님의 영원하심 안에서 이 모든 것은 찰나일 뿐이니 말이다.

둘째로,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내포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 속한 일까지도 철저히 또 완벽하게 아신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처음부터 장래 일들을 알려 주고 예전부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알려 주며 ‘내 계획은 성사되고 나는 내 뜻을 모두 이룬다.’고 말하는 이다”(이사 46,10). 이 하느님의 지식은 시간뿐 아니라 공간도 초월한다. 하느님의 지식은 우주만상을 꿰뚫어 안다.

여기서의 결정적인 메시지는 “하느님은 지혜이시다”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우리가 왜 답답한 것인가? 답을 찾는데 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 헤매는가? 답을 찾기에 그렇다. 그런데 하느님은 지혜이시며 전지하시다. 그분에게 답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믿으며 그분께 지혜를 구하면, 우리 명오를 열고 지혜를 내려주신다.

셋째로, ‘전능하신’은 하느님의 ‘편재(遍在)하심’을 내포한다. 이는 하느님이 무소부재, 곧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없다”란 말이다. 그래서 두루 계시다고 하는 것이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6). 재미있는 것은 하느님의 편재하심을 가리키는 유비쿼터스(ubiquitous)라는 단어가 요즈음엔 첨단 IT기기 네트워크의 성능을 과시하는 용어로 전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넷째로, ‘전능하신’은 하느님의 ‘정의’를 내포한다. 정의를 공의(公義) 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상선벌악’의 분배 정의를 가리킨다. “그분께서는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되갚으시고 인간을 그 길에 따라 대하십니다”(욥 34,11).

한 몇 년간 우리나라에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가 화젯거리였다. 많은 주장이 있었지만 말만 많았던 데 비해 핵심이 빈약했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그 핵심을 딱 두 단어로 정의했다. “각자에게 그의 것”(라틴어로 cuique suum). 이것이 정의다. 각자에게 돌아갈 몫이, 각자에게 돌아갈 땀이, 각자에게 돌아갈 보상이, 각자에게 돌아갈 책임이, 각자에게 돌아갈 벌이 돌아가는 것…. 이것이 정의다. 이런 정의로 아빠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다섯째로, ‘전능하신’은 하느님의 ‘전선(全善)하심’을 내포한다. 전선의 뜻은 “악이라는 것은 요만큼도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로마 8,28 참조) 분이시다.

‘선하신’ 하느님은 동시에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다. 또한 ‘선하신’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이 선하심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앞에서 예로든 이야기 속 야곱이 만난 하느님에게서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속성을 고스란히 만난다. 우선 야곱이 돌베개에서 만난 하느님은 ‘편재’하신 하느님이었다. 그 하느님은 ‘전선’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어쩌면 사기꾼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었던 야곱에게 나타나 주셨다. 그리고 바야흐로 그 하느님이 당신의 ‘정의’와 ‘전지’로, ‘영원’의 하느님으로서 당신께서 장악하고 계신 시간 안에서, 당신의 뜻을 착착 전개하고 계신 것이다. 이렇게 그 야곱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세우고자 하신 구원경륜의 수레바퀴는 굴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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