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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0) 신의 옷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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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0) 신의 옷자락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



■ 어리석은 자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

20대가 저물어갈 무렵, 나는 영국의 프랜시스 톰슨(1859~1907)의 시에 홀딱 매료된 적이 있다.
마약중독자였던 그는 자신을 절망의 나락까지 끈질기게 추적하는 하느님을 ‘하늘의 사냥개’로 비유한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자신의 시도가 여지없이 실패로 끝난 사연을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
밤과 낮과 오랜 세월을 그로부터 도망쳤다.
내 마음의 얽히고설킨 미로에서
눈물로 시야를 흐리면서 도망쳤다.
나는 웃음소리가 뒤쫓는 속에서
그를 피해 숨었다.
그리고 나는 푸른 희망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 올라갔다가
그만 암흑의 수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틈이 벌어진 공포의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힘센 두 발이 쫓아왔다.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짐이 없는 걸음으로
유유한 속도, 위엄 있는 긴박감으로
그 발자국 소리는 울려왔다.
이어 그보다도 더 절박하게 울려오는 한 목소리,
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게 저버림을 당하리라! […]”

“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게 저버림을 당하리라!”

섬뜩한 말이다. 하지만 저주가 아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등지는 이를 내치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부모를 잃은 고아의 처지를 말하는 것이다. 아니 굴러온 복을 차버린 사람의 영원한 회한을 말하는 것이다.

한 유명한 무종교인 사언더스는 <아메리칸 매거진>(American Magazine)에서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저울질해 보는 자신의 고뇌를 적나라하게 술회한다.

“당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행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소개하고 싶다. 지금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 무덤 다음에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몸과 성격을 구성하는 원형질과 정신원형질의 분해뿐이다. 하지만 이런 물질주의의 관점에서 나는 어떠한 희열이나 행복도 발견하지 못한다. […] 얼굴에는 용감한 표정을 지을 수 있지만 행복하지는 않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서, 왜 왔는지 모르는 채로 우주의 광대함과 웅장함 앞에서 두려움과 경외를 느끼며 서 있다. 그는 우주 공간의 거대함과 시간의 무한함에 질리며 자신의 연약함, 가냘픔, 짧음을 깨닫고서 자신의 무한한 왜소함에 코가 납작해진다. 분명 그는 때때로 자신이 의지할 지팡이를 그리워한다. […]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헤매고, 헤매고, 헤매는 그 뗏목 위에서 그의 마음은 모든 귀한 삶을 몹시도 동경하고 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초라하고 왜소하고 무력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고백이다. 무종교인 사언더스는 그나마 다행이다. 이 비극을 인식이라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불행을 불행으로 깨닫지 못한 채,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한다. 그러기에 시편 저자는 이렇게 꼬집어 말한다.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시편 14,1).


■ 신의 존재 증명

그렇다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서양사에서 1,0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지성으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삼단논법으로 말한다.

“인간은 유한하다. 하지만 신은 무한하다.
유한한 것은 결코 무한한 것을 밝혀낼 수 없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은 결코 무한한 신을 밝혀낼 수 없다.”

이런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들은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존재론적 논증’과 ‘목적론적 논증’ 그리고 ‘우주론적 논증’이 있다.

존재론적 논증은 중세 신학자 안셀무스(1033~1109)의 주장으로, 하느님이란 개념의 정의가 하느님의 존재를 함축한다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을 ‘하느님 그분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분’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분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목적론적 논증은 토마스 데 아퀴노가 제창했다. 모든 만물의 질서와 아름다움에는 그 배후에 어떤 설계자가 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이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암시하는 데까지는 나아간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역시 토마스 데 아퀴노가 시도한 우주론적 논증이란, 이 세상의 만물은 다 그 원인을 가지고 있는데 그 최초의 원인자가 바로 하느님이라는 주장이다.

“아무것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 그러나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다. / 따라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것도 스스로의 움직임에 대한 원인이 될 수 없다. / 그러나 모든 것의 움직임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 따라서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원인이 있다.”

하지만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그의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런 증명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적시하였다. 그는 인간의 순수 이성은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하여 무한한 실재인 신을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대신에 실천이성이 신의 존재를 요청할 뿐이라 하여, 신 존재 논증과 관련된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와 같은 노선에 있는 칸트의 주장은 철학계에서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

20세기 대표적인 사상가 카를 힐티는 신존재 증명의 대안을 이렇게 제시한다.

“모든 존재 및 생성의 근원으로서의 신은 설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또한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선 신을 믿고, 그 다음에 몸으로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거듭 확실하게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될 명제다.”

이제 신은 ‘증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체험되는 존재’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제 신의 ‘증거자’로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좀 싱거울 듯한 예를 들어보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귀천(歸天)을 노래했던, 고주망탱이 시인 천상병은 진즉 체험한 하느님이 그리워 오늘 구두를 닦으려고 차례를 기다린다.

“오늘같이 맑은 가을 하늘 위
그 한층 더 위에, 구름이 흐릅니다.

성당 입구 바로 앞
저는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구 지키는 교통순경이
닦기 끝나면, 저도 닦으려고요.

교통순경의 그 마음가짐보다
저가 못한데서야, 말이 아닙니다.

오늘같이 맑은 가을 하늘 위
그 한층 더 위에, 구름이 흐릅니다.”

‘맑은 가을 하늘 위 그 한 층 더 위’를 바라보는 술 취한 시선이 바로 억제할 수도 금지할 수도 없는 종교심일 터다. 그리고 거기 흐르는 ‘구름’이 바로 바람결에 나풀거리는 신의 옷자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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