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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33) 그대, 부활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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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33) 그대, 부활했는가


영원한 생명 담보로 주신, 절망을 이긴 희망 ‘부활’



■ 복사 할아버지의 추억

오스트리아 빈 유학시절 빈 교구 소속 본당의 주말 보좌신부를 겸했다. 나는 주로 새벽미사를 집전하였다. 미사 때마다 동일한 할아버지가 복사를 서 주셨다. 그는 미사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는 5~10분 동안 독일 유머나 속담을 내게 가르쳐 주셨다. 그 중 내게 지금껏 빛이 되어 준 한 말씀.
 
“그리스도가 백번을 부활해도 내가 부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나의 부활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부활도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경탄할 필요도 찬미할 필요도 없다. 내가 부활해야 한다. 오늘 이 세상의 삶에서 여러 형태의 죽음으로부터 소생해야 한다. 내가 변화된 삶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저 속담은 처음 듣는 순간 내 영성을 확 뒤집어 놓았다. 그동안 예수님의 부활에 압도되어 그냥 구경꾼처럼 박수만 쳐 왔던 나! 그 찰나부터는 어떻게 해야 내가 부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를 골똘히 궁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셨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Jesus is alive”다. 예수님은 ‘과거에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살아나셔서 “지금 살아 계신다”. 우리를 위해서 지금 살아 계신다.
 
이런 예수님의 부활에 힘입어 우리가 부활할 차례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선, 이 세상의 죽음, 절망 등에 너무 시달리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부활로 죽음, 절망 등을 무력화시키셨다. 살면서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실패보다도 강한 것을 주셨다. 영원한 생명을 담보로 주신 것이다. 그러니 희망이 절망을 이긴다.
 

■ 다시 새겨 보는 의미
 
그러면 이 부활의 의미는 무엇일까? 성경의 진술들은 이렇게 답한다.
 
첫째, 부활은 죽음을 쳐 이긴 사건이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4-55)
 
이 말씀은 죽음을 무력화시켰다는 얘기다. “죽음을 없앴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죽음은 있다. 아직도 죽음은 우리에게 운명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죽음을 무력화시켰다. 죽음이 얼마나 강한가? 죽음은 가장 강한 부정이다. 그런데 그 부정을 무력화시켰다. 긍정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영성이고 철학이며 위로다. “부활이 죽음을 무력화시켰다. 절망을 무력화시켰다. 이 세상에서 상처를 무력화시켰다. 모든 것을 이긴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다!” 이 힘으로 우리는 살고 있다.
 
둘째, 부활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주님이심을 확증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하긴 하는데, 이 고백은 아직 80%의 고백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는 비로소 100%의 고백을 하게 되었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다음의 성구다.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4).
 
요지는 성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켜주심으로써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해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표현하는 ‘부활’이라는 말은 사실 부족한 언어다. 부활은 곧 ‘스스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부활을 뜻하는 원어인 그리스어 ‘아나스타시스’의 의미에서 더 많이 강조되는 것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살려내셨다’는 사실이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드렸던 그 용서의 제사를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고 인준하시는 의미로 예수님을 ‘부활시켜주셨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기에 부활은 성부와 성령께서 함께 이루신 업적이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쌓으신 공로로써 ‘되살리심’을 누리실 자격이 있으셨던 것이다.
 
셋째, “우리가 그 덕에 부활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콜로 1,18)로 부활하셨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우리 자신도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이유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부활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생각할 수 없다.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신호탄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20).
 

■ 이 시대 부활의 증인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 된 후,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공산 정부의 집요한 회유를 거부하다 13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그 중 9년을 독방에서 생활했다.
부활 신앙을 고백하며 쓴 반 투안 추기경의 다음 글은 1976년 10월 7일 묵주기도의 축일에 베트남 중부 푸칸의 감옥 독방에서 쓰여진 것으로, 지금 누리는 부활 신앙의 정수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사랑하올 예수님,
오늘 저녁 불빛도 창문도 없고, 찜통같이 더운 저의 감방 뒤편에서 저는 가슴 북받치는 감상에 젖어 저의 사목생활을 회고합니다.
저의 감방에서 2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주교관에서 주교로서 보낸 8년간, 그러나 이제 같은 거리, 같은 해안에서 저는 태평양의 파도소리와 주교좌 성당의 종소리를 듣습니다.
한때 저는 금으로 된 성반과 성작으로 미사를 봉헌하였으나, 이제 당신의 성혈은 제 손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한때 저는 대회와 회의를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하곤 했으나 이제 저는 창문도 없는 좁은 감방에 갇혀 있습니다.
한때 저는 감실에 모신 당신을 조배하곤 했습니다만 이제 저는 당신을 제 호주머니 속에 밤낮으로 지니고 다닙니다.
한때 저는 수천 명의 신자들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곤 했습니다만 이제 밤의 암흑 속에서 모기장 밑으로 성체를 전하고 있습니다. […]
매트 위에서 흰 버섯이 자라는 이 감방, 여기에서 저는 행복합니다.
왜냐면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당신께서는 제가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생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
저는 저의 십자가를 받아들여 제 두 손으로 가슴속에 묻습니다.
만약 당신이 제게 선택을 허락하신다 해도 저는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 속에서 당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형태의 죽음도 위협이 되지 않고 고통이 되지 않고 원망거리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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