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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46) 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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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46) 사하노라

‘심판’ 아닌 죄로부터 ‘구원’ 위해 오신 예수님 …



■ 왜 인간인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나?

어쩌다 개신교 신자들과 대화를 나누게 될 경우, 가장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고해성사에 관한 것이다.
 
“왜 굳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 합니까? 예수님께 직접 죄사함을 받을 수는 없나요?”

이런 물음에 대하여 나는 이런 식으로 답변을 꾀한다.

“물론 예수님께 직접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 대화가 그저 침묵 속에서 영적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과연 그 죄가 사하여진 것인지 확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답답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답답함을 미리 내다 보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파격적으로 도우시려고 사제의 입술을 빌려 죄의 사함(=사죄경)을 선언하도록 제도를 마련해 주셨던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나오죠? 나는 고해성사라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구절을 본적이 없는데요?”

이런 물음이 나올 정도가 되면 설명은 거반 된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답변으로 요한 복음 20장 22-23절을 제시하며, 한 구절 한 구절 풀어주면 되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예수님 공생활 3년을 시종일관하게 동행한 핵심주제였고, 십자가는 죄의 용서를 위한 제사였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즉시 성령을 주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말씀을 읽을 때 그 듣는 이가 누군지 먼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어느 경우는 청중에게, 어느 경우는 율법학자에게, 어느 경우는 제자들에게만 말씀이 내려진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방금의 이 말씀은 다락방에서 철저하게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전적으로 사도들에게 사죄권을 위임하기 위한 하느님의 구원적 조치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을 받아라”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성령’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현존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제자들이 용서를 베푸는 그 현장에 하느님과 예수님이 성령과 함께 같이 임재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는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권한이며 사명이었다.

사도들의 후계자는 주교들이며 주교들의 협조자가 사제들이다. 그래서 사제들은 주교에게서 예수님이 부여하신 사죄권을 위임 받는다. 그리하여 사제가 하느님을 대신하여 신자의 고백을 듣고 ‘사죄경’을 통해 죄사함의 선언을 할 때 신자는 하느님의 용서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혼자서 마음 졸이며 하느님을 독대하고 하는 회개보다 고해성사의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하겠다. 그 차이는 예수님을 아직 모르는 채 하느님과 맞대면해야 했던 구약의 백성이 가지고 있던 ‘답답함’과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신약의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로움’의 차이가 아닐까.
 

■ 죄의 용서를 믿으며

지금 우리가 사도신경을 음미하며 은혜를 누릴 대목은 ‘죄의 용서를 믿으며’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죄의 용서’를 고백할 때 이를 라틴어로는 ‘레미시오넴 페카토룸’(remissionem peccatorum)이라고 한다. ‘레미시오넴’은 ‘용서하다’의 뜻을, ‘페카토룸’은 ‘죄’를 뜻한다. 용서를 뜻하는 ‘레미시오넴’의 원형동사 ‘레미시오’(remissio)는 ‘묶인 것을 풀어줌’을 뜻한다. 이는 죄가 자신을 묶는 것과 같다는 통찰을 함의한다.

그리스어로 죄를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하는데 이는 어원적으로 활 쏘는 사람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 자신이 태어난 목적을 바로 알지 못하고 비뚤어진 데로 나가거나 목적과 어긋난 행동을 했을 때 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것,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른 것이 죄다.

그런데, 이 세상 죄의 문제는 어느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이 죄는 인간을 심판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상선벌악이라는 것이 만고의 진리로 굳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이.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적인 진리다. 이런 비극적인 배경에서 예수 사건이 전개됨과 함께 죄의 용서에 관한 기쁜 소식이 선포되었고, 그것이 그대로 사도신경의 핵심 신조로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


■ 성경 말씀이 주는 깨달음

죄에 대하여 가장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것은 역시나 성경 말씀이다.

야고보서는 이 죄의 뿌리와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

이 말씀은 곧 우리 이야기다. “내가 죄를 언제 지었더라?” 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욕심을 많이 냈을 때 죄를 짓는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면, 하여간 마지막에 죽는 죽음 말고도 우리 안에 뭔가가 죽는다. 자꾸 피해를 입는다.

사도 바오로는 ‘한 사람’의 죄가 어떻게 퍼지게 되었는지 이렇게 밝힌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이 세상에 죄가 쫙 퍼져버렸다. 우리의 경험만 봐도 뭐든 한 사람이 일을 시작하면 순식간에 퍼지게 되어 있다. 가만히 있다가 누가 하는 거 보고 호박 서리도 하고, 그다음 참외 서리도 하고. 이렇게 처음에는 누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게 된다. 이를 우리는 퍼짐의 법칙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

그런데, 그 죄의 결과는 비참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로마 3,23).

태초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파라다이스, 그 낙원의 특권을 잃게 되었다는 말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 부자유를 이렇게 탄식하였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로마 7,19-21).

사도 바오로는 이처럼 자유를 상실하여 죄에 시달려 온 자신을 비참한 인간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렇게 부자유 속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자유를 되찾을 길이 생겼다. 십자가로 죄를 해결해 주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로마 7,24).

그렇다. 예수님은 죄의 심판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이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이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 덕택에 우리는 이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존재들이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1베드 1,18-19).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죄의 근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죄의 용서를 담보하는 주옥과 같은 말씀들을 일별해 봤다. 너무나 귀하기에 가감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하나같이 눈물로 읽어야 하는 말씀들이다. 통회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 누구든지 자신의 지나온 삶을 투영하며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어느새 우리의 마음에서는 한류와 난류가 뒤섞이며 은총으로 흐느끼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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