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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47) 용서받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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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47) 용서받으셨습니까

정서적 육체적 치유 도구 ‘고해성사’


■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엎어 보고 메쳐보고 뒤집어 보고 다시 봐도, 신나기만 한 이야기가 죄의 용서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흥분되고 감사로운 이야기! 하도 은혜로워서, 본당 사목을 하던 시절 나는 예비신자들에게 그 대목을 이렇게 설명해 주는 재미를 즐겼다.

“여러분, 결국 우리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가게 되면,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물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물음 앞에 사람들은 용빼는 재주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 앞에서 우리는 죄를 숨길 수도, 축소할 수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우리의 알량한 ‘선행’을 내세워 정상참작을 청하는 것 밖에.”

“…….”

“아마도 개신교 신자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으니 용서받지 않았느냐’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주장이 과연 받아들여질 지는 각자 드렸던 회개의 질, 곧 회개의 진정성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 그럴 때 가톨릭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대답하는 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땅에서 다 풀고 왔는데요!’”

“!!!”

그렇다. 저 한 마디면 골치 아픈 문제는 끝나게 되어 있다. 왜?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고 계실 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땅에서 푸는 권한’을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18-19).

이는 빈말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가톨릭교회는 예수님이 위임하신 ‘푸는 권한’ 곧 죄의 용서를 실효적으로 보장해 주기 위하여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라는 제도를 구비하였다. 그러니 이들 성사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은 신자들이 나중에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저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어느 안전이라고 무례한 말을 하느냐. 무엄하도다!” 하는 불호령이 떨어질 일은 없을 것 아니겠는가.

이런 이유로, 고해성사에 충실했던 교황 요한 23세는 고해성사의 은총을 확신해 마지않았다.

“천당으로 가는 문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천진난만함이고 다른 하나는 참회입니다. 보잘것없는 우리가 어떻게 첫째 문이 활짝 열려 있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나 두 번째 문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있습니다.”


■ 용서의 특은

죄의 용서는 비로소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열린 전혀 새로운 차원의 특권이다. 세상의 모든 고등종교는 ‘죄’의 결과에 대하여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약간씩 용어만 다를 뿐, 대강의 개념은 똑같다. 구약성경 역시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죄에 대한 응보(應報)의 벌(罰)이 따른다는 신념을 전한다.

“죄를 겹쳐 짓지 말아라. 죄 하나로도 벌을 면할 수가 없다”(집회 7,8).

“죄인들의 길은 돌도 없고 평탄하지만 마침내는 지옥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집회 21,10).

이러한 믿음이 구약성경의 믿음이었으며 이후 유다교의 믿음이 되었다. 그리고 사실 이는 세계의 모든 종교가 믿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불교 역시 죄지은 사람은 죄지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 이치라고 보았다. 이른바 업보 사상이 그것이다. ‘업’(業, Karma)이란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그것이 선업이냐 악업이냐에 따라서 응보(應報)의 대가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 업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인간은 윤회의 굴레 안에서 악업과 선업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고, 죄 많은 인간은 그 질곡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단 불교가 아니라도 죄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이처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예수께서 당신 삶과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셔서 죄의 용서를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제사로 용서를 완성하시고 나서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 이로써 ‘업보’의 숙명도 ‘상선벌악’의 굴레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끔히 청산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법칙, 응보의 원칙을 따라 복수와 징벌을 가하고자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법칙을 ‘용서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그 법칙이 해방의 길이며 생명의 길임을 보여주시고 완성하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죄의 용서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가 누리게 된 유일무이한 특권이다. 이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런 은혜인가. 세상 살면서도 은혜가 크면 그 감사함으로 인해 눈물이 절로 흐른다. 이럴진대, 이 용서의 은혜에 대해 아직도 우리가 흘리지 못한 눈물은 얼마나 많은가.


■ 고해의 모순

누구든지 고해성사를 치르면서 죄와 보속 사이의 불균형을 체험해 봤으리라. 우리는 이를 고해의 모순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첫 고백’이라는 시에 표현된 시인 정희성의 심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한다.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 삼십 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 보니 /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을 했더니 /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 그냥 그대로 했다” (정희성, 「2000년 한국가톨릭시선」)

시인이 느끼는 괴리감. 엄청난 세월 동안 쌓아 두었을 분노와 욕설이 몇 백 근은 너끈히 될 터인데 사제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고작 주기도문 열 번의 보속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실상은 고해소의 은총이다. 죄와 보속의 불균형, 이것이 고해소의 모순이며 정의(正義)다. 그래서 시인은 ‘그 엄청난 죄에 고작 주기도문 열 번’이라는 보속을 어린애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행했을 터다.

비슷한 체험을 시인 장정애가 ‘고해소를 나오며’라는 시로 전해 주고 있다.

“참 알 수 없는 당신의 저울 / 그 한 가슴의 사랑과 / 수많은 유다를 / 한몫에 매기시더니 / 오늘 / 송곳 같은 나의 죄와 / 성모송 한 번을 / 같은 추에 두시다니.” (장정애, 「2000년 한국가톨릭시선」)

이 시인 역시 고해성사의 무량한 은총을 짤막한 문장으로 담아냈다. 그 의아심과 벅찬 감격을 그려낸 것이다.

죄는 우리를 얽어매고 하느님 사랑의 흐름을 막는 힘을 발휘한다. 죄책감을 느낄 때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속으로 숨어버린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죄책감으로 움츠러들고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악마의 거짓 논리에서 비롯된 거짓 양심의 가책이다. 회개는 다시 우리를 들어 올려서 하느님 사랑의 흐름을 터놓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까닭에 ‘고해성사’라는 은총의 강력한 도구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정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치유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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