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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18)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35) - 집행자, 엘리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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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18)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35) - 집행자, 엘리사 (하)

엘리야에게 내린 예언 말씀, 뒤이어 모두 완수



■ 엘리사 활약의 결산

앞의 엘리야 편 글에서 엘리야가 호렙 산에 들어가 야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예언말씀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다시 상기하자면, 그 핵심은 이렇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임금으로 세우고,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1열왕 19,15-16).

다소 길지만 그대로 옮겨봤다. 그 까닭은 이 말씀들이 액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그 이후의 성경 사록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할 사실이 있다. 예언 말씀의 지시는 분명히 엘리야에게 내렸는데, 임무완수는 엘리사를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졌다는 점! ‘다마스쿠스’에서 아람 임금 벤 하닷의 신하 하자엘에게 다음 임금이 될 것을 선언한 것은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사였다(2열왕 8,13 참조).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운 것 또한 엘리사, 더 정확히 말하여 엘리사의 명을 받든 그의 제자를 통해서였다(2열왕 9,6-10 참조).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크게 두 가지가 읽힌다.

첫째, 엘리사의 정체성은 스승 엘리야에게 내린 예언 말씀의 ‘집행자’라는 사실이다. 횟수와 양상에서 스승 엘리야를 능가하는 기적들을 행했던 엘리사가 사실은 독자적 예언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엘리야 예언의 성취자 내지 완수자였던 것! 말하자면, 예언 말씀의 성취에 2세대가 요구되었기에 하느님께서 엮어주신 특임의 ‘2인 1조’였던 셈이다. 엘리야 예언자에게 내린 예언 말씀이 다 이루어졌을 때, 이를 확실히 언급해 두는 다음의 대목이 이런 결론을 뒷받침해 준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이루셨습니다”(2열왕 10,10 2열왕 9,36 참조).

둘째, 내용적으로 볼 때, 엘리야 예언자를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켰던 이스라엘 최악의 우상숭배자 아합 왕과 왕비 이제벨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엘리사 활약의 기저를 흐르는 복선으로 깔려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엘리사 시대의 그 장황하고 복잡다단한 역사가 엘리야 시대에 발단이 된 야훼 신앙과 바알(및 아세라) 우상숭배 사이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다는 얘기다. 우상숭배가 얼마나 지독스럽게 성행했기에 그랬을까! 또 우상숭배를 야훼 하느님께서 얼마나 혐오했기에 그랬을까! 뭔가 묵직한 영적 각성의 동인(動因)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 집행자 영성

엘리사는 확실히 엘리야의 후광 덕에 큰 예언자로서 활약하였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를 이렇게 기록한다.

“엘리야가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엘리사는 일생 동안 어떤 통치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
살아생전에 엘리사는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다”(집회 48,12.14).

이 기림글이 드러내고 있듯이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차서’ 활약하였다. 그랬기에 두려움을 모른 채 위풍당당하게 숱한 기적들을 행했다. ‘기적’과 ‘업적’은 예언의 선포자로서 보다 예언의 집행자로서 엘리사의 정체성을 부각시켜 준다. 담대한 집행자! 이런 초상(肖像)으로 후대 이스라엘 현자들은 엘리사를 기렸다.

집행자 엘리사! 매력 있는 타이틀이다. 하나의 본(本)으로 삼아도 될 만한 영적 기상이 느껴진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회에 가장 필요한 영성이 바로 담대한 실행이 도드라진 엘리사표 영성일지도 모른다.

최근 수십 년간 많은 교회 지도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다양한 시각에서 언급된 교회의 위기 국면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원주의(결과적으로 다신론)의 침식에 따른 신앙의 총체적 위기, 기성 신앙인들의 이탈 및 해이! 이에 대한 바람직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필경 탁월한 신학자들의 격론을 통해 도출된 묘안은 아닐 터다. 어느 역사적 존재도 답을 몰라서 몰락한 적은 없다. 더구나 구원의 역사에서는 더욱 그렇다. 답은 이미 명료하게 주어졌다.

십계명의 충실한 준행!(신명 30,15-16 여호 1,7 참조) 내용적으로 경천애인(敬天愛人).

뻔하고 뻔한 답이다. 하지만 이 답 안에 인류번영의 모든 심오한 비밀이 다 함축되어 있다. 일단 실행하기만 하면, 굳이 그 깊은 의미를 모른다 해도, 번영의 이치는 작동된다. 십계명을 왜 지켜야 하는가? 나와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서다. 왜 경천애인해야 하는가? 그것이 최상의 인륜(人倫)인 동시에 만사형통의 대로(大路)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쉬운 답인가! 그럼에도 이 쉬운 답을 우직하게 살아낸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기에 엘리사표 ‘집행자’ 영성이 아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실행, 실천, 행동 등을 전면에 내세울 때 꼭 주의해야 할 유혹이 있다. 바로 ‘자기’라는 이름의 우상, 아니면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우상에 빠질 유혹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름으로 ‘집행자’ 영성을 살고자 하는 이는 우선적으로 다음의 말씀이 권하는 마음가짐을 기본기로 익힐 일이다.

“그분께서는 준마의 힘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장정의 다리를 반기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당신 자애에 희망을 두는 이들을 좋아하신다”(시편 147,10-11).

‘준마의 힘’이나 ‘장정의 다리’는 이미 자기 능력이다. 이것에 의지하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권능이 끼일 틈이 없다. 하느님의 뜻도 자신의 뜻에 밀려난다. 반면,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지혜와 권능이 환영리에 드러난다.

이 시편 말씀을 유념하면서, 우리도 ‘집행자’ 영성을 한 걸음씩 걸어봄이 어떨까. 그 원조 엘리사에게 전구를 청해봄은 어떨까. 기대하건대, 만일 우리가 그럴 양이면, 엘리사 뿐 아니라 엘리야 성인도 합세하여 이렇게 강복을 빌어주지 않겠는가.

나의 아버지, 모든 거룩한 이들의 아버지!
여기 무릎 꿇은 이를 굽어 살피사
굳센 믿음을 내려 주소서.
그는 ‘남은 자 칠천 명’(1열왕 19,18 참조) 가운데 하나,
그 갸륵함을 보사 그에게 용사의 결기를 내리소서.
성령으로 그를 새로 빚으시어
머리는 소박하고, 입술은 신중하며, 가슴은 두텁고, 몸은 뚝심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가
그 소박으로 오롯이 주님 말씀에 콧노래 부르고,
그 신중으로 매번 예와 아니오를 감연히 가르고,
그 두터움으로 언제나 맷집 있게 희망 두르고,
그 뚝심으로 온갖 파랑을 헤치고 천명을 결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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