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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23)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40) - 슬픔의 예언자, 예레미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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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23)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40) - 슬픔의 예언자, 예레미야 (상)
 
하느님 응원으로 절망 이겨내고 새롭게 말씀 선포



■ 감성 시인

예언말씀이 대체로 시적이지만, 그중 예레미야 가슴을 통해 토해진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그러하다. 문학적으로 보자면 예레미야는 감성 시인이다. 실감을 위하여 몇 구절만 보자.

“유다가 슬피 울고 그 성읍들이 쇠약해져 간다. 그들이 땅에 쓰러져 통곡하고 예루살렘이 울부짖는 소리가 높이 오른다”(예레 14,2).

이는 장차 예루살렘에 닥칠 파국에 대한 서술이다. 요컨대 ‘통곡이 치솟는다’는 얘기다. 동원된 언어들이 읽는 이들을 이미 고통의 복판으로 유인하지 않는가. 이는 맛보기일 뿐. 예언말씀으로 인해 그가 겪은 고통을 표현하는 대목은 읽는 이의 잠자던 감성을 흔들어댄다.

“내 심장이 내 안에서 터지고 내 모든 뼈가 떨린다.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술에 전 인간처럼 되었으니 이는 주님 때문이요 그분의 거룩한 말씀 때문이다”(예레 23,9).

느낌이 팍팍 온다. 훨씬 더 센 탄식도 있다.

“내 살과 내 살갗을 닳아 없어지게 하시고 내 뼈를 부수시며”(애가 3,4)

읽는 것 자체로 소름이 돋는다. 통곡이 치솟는다, 뼈가 떨린다, 살갗이 마모된다, 뼈가 으스러진다…. 모두가 예레미야가 바라본 현실의 우상놀음과 패역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서민들의 생활고, 이런 것들에서 직감되는 미구의 참상에 대한 언어적 반응이다. 그 실체는 물론 안타까움, 슬픔, 연민, 고통 등일 터다.

어쨌건, 예레미야는 이러한 고감도 공감력으로 백성과 하느님 사이를 중재했다. 그는 항시 하느님의 애간장 녹는 연민과 일체감을 느끼든지, 아니면 예언말씀을 듣는 청중의 처지에 감정이입하여 공명하고 있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러기에 이래저래 그는 마음이 심란했다.


■ 고통은 ‘내’ 운명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리기 시작한 것은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유다 왕이 된지 십삼 년 때의 일이었다. 그의 활동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에 이어, 또 다른 아들 치7드키야 통치 십일 년,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히즈키야 왕에게 이사야가 있었다면, 요시야 왕에게는 예레미야가 있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제도혁신을 기치로 내건 외적개혁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내적쇄신의 가이드라인을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제시하였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예레 7,3-4).

요시야 왕이 그토록 공을 들였던 성전정화, 전례의 정상화 등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마음의 회개가 먼저라는 것. 그리하여 생각의 ‘길’과 ‘행실’을 뜯어고치는 내적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전례 및 제도 개혁이 온전한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죄스런 인간이 내면에서부터 새로워질 수 있는가? 이는 추상적인 답변을 거부하는 물음이다. 오직 구체적인 대안만이 실효성을 지닌다. 그러기에 그의 예언말씀은 뭉뚱그려 선포되지 않고, 사회 모든 부류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맞춤으로 겨냥한다. 그는 ‘돌직구’로 말할 권위를 이미 예언 초기에 부여받았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 /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 뽑고 허물고 / 없애고 부수며 /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예레 1,9-10).

예레미야가 말하는 대로 흥망이 결정된다는 약속! 하지만 아무리 옳은 말도 듣는 이 입장에서는 거북할 따름. 그가 앞날을 멀리 보아 남들 다 “잘 된다”고 할 때 “이러다가 망한다”고 이야기하고, 남들 다 “죽겠다”고 할 때 “살 길이 있다”라고 청개구리처럼 말하니, 누가 반기겠는가. 그로 인해 그는 숱한 고통을 겪는다. 온갖 비방과 혹평(예레 12,6 참조), 함구령(예레 11,21 참조), 체포 및 가택연금(예레 26,8 38,6 참조), 고문(예레 37,15 참조), 심지어 진흙구덩이 생매장(예레 18,22 참조) 등 말 그대로 기구망측하다. 박해자는 왕, 고관대작, 사제, 백성, 친척과 동향인 등 가릴 것 없다.

그 시달림이 얼마나 고역이었으면 예레미야 입술은 항시 ‘레마?’(=어찌하여?)라는 물음을 달고 다녔을까. 원망의 절정은 태어난 날을 성토하는 대목이다.

“저주를 받아라, / 내가 태어난 날! 복을 받지 마라,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 /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 고난과 슬픔을 겪으며 / 내 일생을 수치 속에서 마감해야 하는가?”(예레 20,14.18)

그러나! 예레미야는 절망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견뎌냈다. 그때그때 하느님의 응원이 그를 동행했기 때문이다.


■ 불가항력

그의 예언 활동이 중기를 지나고 있을 무렵, 예레미야는 심한 의기소침에 떨어진다. 방금 언급했듯, 말씀을 전하면 되돌아온 것이 굴욕적인 박해였으니, 심사가 괴로울 만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으로 수백 번, 수천 번 예언 활동을 접는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이 불가항력은 예레미야 자신의 것만이 아니다. 이 시대 남은 자, 뜨거운 가슴들의 몫이기도 하다.

수만 번, 아니 무수히
접었었지.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심했었지.
“북에서 오랑캐가 쳐들어온다.
야훼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의 운명을
흉포한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의 손에 맡기셨다.
필연이다, 슬퍼하지도 울지도 기도하지도 말라”라고
야훼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저마다 머리에 재를 뿌리고 가슴을 찢을 줄 예기했건만,
되돌아온 것은 육두문자에 차꼬에 진흙 구덩이 생매장!
그래, 역류하는 피가 저항가를 불러댔지.
그래, 그분을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래,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그래, 이 결정에 번복은 없다.

그 노래 밤낮으로 불러대도,
나의 음모는 번번이 실패!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불가항력, 아- 어쩔 수가 없어.
저 어둠 골에 유폐하고 덮어두고 눌러둔 그 말씀,
스스로 발화하여 작열하니 심장이 달궈져 통제불가.
장작불 같은 진노에
용암 같은 자비가 덮쳐
하릴없이 사명이 용약하누나.

이 몇 번째 ‘다시’인가.
“나,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나이다.
나 무슨 강단으로 끝까지 저항하리오.
나 무슨 명분으로 거부하리오.”
이판사판!
말씀을 전하고 청중에게 맞아죽나
요지부동하다 말씀에 데어 죽나, 마찬가지.
기왕 선포할 바에야, 내친김에
불같이
미친 듯이
신명나게.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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