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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41)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58) - 빗나간 회개자, 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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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41)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58) - 빗나간 회개자, 유다

탐욕으로 예수님 팔아넘긴 ‘불세출의 변절자’

 

 

■ 유다의 오산

오늘날 ‘유다’라는 이름은 거의 모든 언어권에서 ‘배반자’라는 뜻을 지닌 대명사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객관적으로 유다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유다는 카리옷 시몬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정식 이름은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이름에서 항상 꼴찌로 소개된다. 하지만, 유다는 돈주머니를 맡았다. 회계! 일반적으로 조직에서 회계는 중요한 직책이다. 이 회계가 잘해야 조직의 운영과 활동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법이다. 그러기에 제자단 안에서 그의 위상은 결코 하찮지 않았다고 봐야 옳겠다. 그 역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성령의 권능을 받아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며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파견되기도 하였을 테니, 무늬만 제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훗날의 역사는 유다에 대하여, 결과적으로 ‘악마의 하수인’, ‘도둑’, 또는 ‘배반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다는 무슨 연유에서 스승 예수님을 적대자들에게 팔아넘겼을까? 요한 복음에는 그 단서를 드러내 주는 한 대목이 있다(요한 12,1-8 참조).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가셨다. 마르타는 늘 하듯이 그날도 예수님의 밥상을 차린다. 그 사이에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 12,3). 사실 마리아는 미구에 닥칠 예수님의 죽음을 직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다는 마리아의 튀는 행위를 보고 바로 돈 계산으로 들어갔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5)

이 생각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 뒤에 ‘삥땅치려는’ 음흉한 저의가 숨겨져 있었다.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6).

이는 이후 유다의 배반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준다. 요컨대, 유다는 평소 돈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서 사심을 품고 있었고, 양심상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경제개념을 삐딱하게 바라볼 명분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군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호구지책! 예수님께서 ‘구원, 구원’ 하시지만 생계가 무너지면 구원이 무슨 도움이람? 경제를 중히 여기셔야 할 텐데, 그와 상관없는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하시니 답답한 노릇이군. 저 정도의 인기면, 돈을 크게 모으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말야. 그러면 내게도 티 안 나게 떡고물 좀 생길 테고….”

처음부터 흑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는 그저 그가 경제적 메시아관에 집착하는 정도였을 성 싶다. 하지만 견물생심! 점차 돈맛을 알아간 유다는 마침내 예수님이 자신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님을 단정하고서, 스승을 적대자들에게 팔아넘기려는 유혹에 넘어갔다. 대충 생각이 아니라 성경 문맥상 개연성이 높은 유추다.


■ 비극의 전말

실행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요한 복음에는 유다가 “이제 더 이상 이분한테는 나올 것이 없구나”라고 결론내리며 사탄의 꾐에 넘어갔음을 시사해 주는 진술이 있다.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요한 13,2).

행동의 시간이 되자 유다는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 26,15) 하고 묻는다. 받은 돈은 은돈 서른 닢! 유다는 그들과 함께 적당한 기회를 노리다가, 미리 짜 놓은 각본을 따라 ‘입맞춤’으로 그들이 실수 없이 예수님을 붙잡도록 돕는다(마태 26,50 참조).

하지만 곧이어 유다는 극심한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일종의 회개였다. 경위는 이렇다. 유다는 그 후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를 가만히 지켜본다. 아무리 그래도 그동안 든 정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일은 그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고약하게 돌아간다. 그동안 자기가 스승으로 따르던 분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과한 처사였다. 양심의 가책이 덥석 느껴진다. 그는 뉘우치고서, 그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면서 말하였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마태 27,4).

유다는 후에 닥칠 일이 두렵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네 일이다.”

절망! 남은 것은 온통 절망뿐이었다. 일을 돌이킬 방도가 없었다. 그러자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5 참조). 사도행전에서는 “거꾸로 떨어져서 배가 터지고 내장이 모두 쏟아졌다”고 기록되어 있다(사도 1,18 참조). 표현은 다르지만 ‘자살했다’는 내용은 같다. 수석 사제들은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 밭을 사서 이방인들의 묘지로 쓰기로 하였다.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마태 27,8)이라고 불린다.


■ 미련

“나는 죄를 지었소”(마태 27,4)라고 뒤늦게 고백한 유다는 은전 서른 닢을 되돌려주는 것을 거절당하자 끝내 자살함으로써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잘못된 선택이 빚은 참변이었다. 사실 면목 없는 것으로 치자면 유다의 배반보다 총애 받던 베드로의 배반이 더 면구스러운 것이었다.

둘 다 나중에 회개하였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회개한 반면, 유다는 자기 심판으로 치달으며 회개하였다. 3년 내내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돈계산’에 정신 팔려 건성으로 들었던 탓일 터다.

유다 역시 자살 직전 기도는 바치지 않았을까. 그의 닫힌 마음을 열고서 억지스럽게 그의 기도를 공감해 본다.

“나는 죄를 지었소.”
억장 미어지는 슬픔이, 은전 서른 닢을 돌려주며
“혹시나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을까?” 하는
일말의 미련을 실어 말했으나,
최후의 선고는
“그것은 네 일이다.”

맞아요,
그것은 내 일.
당신에게서 “은 나와라 뚝딱, 금 나와라 뚝딱” 하는
경제도깨비를 꿈꾸던 것이 화근이었죠.
걸핏하면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라며 해괴한 이론을 펼치시는 당신을
불온한 거짓 예언자로 단정했던 것이
나를 ‘불세출의 변절자’로 만든 결정적 어리석음이었죠.

맞아요, 그것은 내 일!
나는 도둑, 그것도 쩨쩨한 좀도둑이었습니다.
나는 생각 짧은 물질주의자였습니다.
내가 내 탐욕, 내 손, 내 꾀로 당신을 팔아넘겼습니다.
내가 죽을 죄인입니다.
내가 영원히 기억되어 마땅할 배반자입니다.
맞아요, 맞아요, 맞아요….

유다의 진짜 비극은 그의 뉘우침이 자책 언저리를 빙빙 돌았다는 데에 있었다. 만일 그가 베드로처럼 “그래도 나는 너를 용서하노라” 하시는 예수님의 눈빛이라도 마주할 수 있었다면, 얘기는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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