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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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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


인간 양심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보통 어렵지 않게 동의한다.
이런 교리는 거의 모든 종교에 있다. 그런데 가톨릭 또는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고유한 교리가 있다. '연옥'과 '육신의 부활'이라는 교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교리는 이해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연옥에 대해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서로 다르다.


육신 부활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 본래 개념도 단순한 유추만으로는 올바로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는 이 두가지 난해한 문제를 해제(解題)해  드리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 여겨진다.

가톨릭 교회는 '연옥'이 있다고 가르친다.
연옥에 대한 가르침은 구약의 마카베오 후서에 기초하고 있다.
유다 마카베오는 이방인과 전투에서 전사한 유다인들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우상의 부적'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들이 성전(聖戰)에 참전하여
 전사한 사실은 의로우나, 우상을 섬기는 일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유다는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모두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5).

만일 '천국'과 '지옥'밖에 없었다면 유다인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해 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의인 아니면 악인, 곧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분명히 판가름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전사자들은 안타깝게도 '반쪽 의인'들이었다.
교회는 이렇게 '반쪽 의인'인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전에 거치는 정화(淨化) 단계를 연옥이라고 보았다.

또 베드로 1서 말씀도 '연옥'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1베드 3,19).

분명한 것은 여기서 '갇혀 있는 영혼들'이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아니고, 그렇다고
천국에 있는 영혼들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연옥의 상태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교회의 오랜 전통은 연옥이 실재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하느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나라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죽은 후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

예언자 이사야는 환시를 통해 천상에서 옥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 모습을 보고 즉각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공동번역 이사 6,5).

이사야는 사실 죄인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거룩한 삶을 산 '의인'이었다.
그러나 이 의인도 '절대 거룩'과 '순수 사랑' 앞에 자신의 허물과 부족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와 순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쓰레기 같은 존재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곧 천사의 도움으로 정화의 은총을 누렸다. 이 정화를 우리는 연옥(煉獄)이라고 한다.

연옥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매우 신중하다. 보통 신앙인들은 연옥이란 하느님이  아주 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선하지도 않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만드신 일종의  반지옥(半地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반천국(半天國)으로 보는 것이  옳다.
부족한 인간에게 보속과 정화의 기회를 준 자비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죄스런 인간이 거룩하고 무한하며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치르는 정화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연옥은 순수 사랑과 거룩함 앞에, 불순한 자신을 심히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느끼는 만남, 그래서 정화되는 만남인 것이다.
넓게 봤을 때, 연옥은 천국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 천국과 지옥만 있다고 믿는 것과 가톨릭 교리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도신경은 분명히 '육신의 부활'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죽은 다음에 우리 '몸'이 부활한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토마스의 '영육일체설(靈肉一體說)'을 올바로 이해할 때 '육신의 부활'이라는 신앙 고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교리는 죽음으로써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영육통일체가 부활'하게 된다는 교리이다.

영육통일체(靈肉統一體)란 인격 전체 곧 이 세상에서 살았던 '아무개'의 고유성과 특성 전체를 말한다.
따라서 '육신'의 부활이란 이 세상에서의 '인간성' 전체가 그대로 저 세상에서 부활한다는 것이다.
영혼만 분리되어 떠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통째로' 저 세상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체'는 무엇이고 '주검'은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된다.
그것들은 3차원 세계에 존재하는 '몸'의 존재 양식이다. 저 세상은 3차원보다 훨씬 고차원(高次元)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저 세상이 몇 차원인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 물리학계에서 파악된 차원은 11차원이라고 한다.
여하튼 인간은 저 미지의 차원으로 가면서 이미 '새로운 육신'을 입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35-37.42-44.52-53)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몸'이 소멸되지 않고 육체적인 몸이 '씨앗'처럼 죽어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고 말했다.
마치 씨앗이 죽어서 새 생명을 움트게 하듯이 육체적인 몸이 죽어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육체적인 몸이  3차원 공간의 몸이라면 영적인 몸은 부활한 자의 몸이다.

부활하지 않은 몸과 부활한 몸의 차이는 자유에 있다.

이는 애벌레와 나비의차이에 비유할 수 있다. 육체적인 몸은
제한에 묶여 있는 몸이지만, 영적인 몸은 경계, 한계, 속박에 더 이상 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인 것이다.

이 심오한 이치를 우리는 인간 지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교황청 신앙교리성(信仰敎理聖)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성경도 신학도 사후의 생명에 관하여 충분한 빛을 비춰주지는 않는다"
 (「종말론의 몇 가지 문제점에 관한 서한」 1979. 5.11).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은 육신의 부활을 어렴풋이 믿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이 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1코린 13,12)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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