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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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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신학생의 흔들리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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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의 흔들리던 눈빛


이명찬 신부. 서울대교구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1-12)



우리 신학교에는 한양도성 성곽길을 끼고

숲이 우거진 낙산 산책길이 있다.

지난 가을 후두둑 떨어지는 도토리 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하는데

신학생 하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신부님. 전 지금 신학교 생활이 전혀 행복하질 않아요.

작년 처음 입학했을 때는 사방이 전부 환하게 보였었는데...

여기는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요.


아직 2년도 채우지 못한 저학년의 입에서 나온

지쳤다..힘들다...는 표현에 나 역시 가슴이 꽉 막혀오면서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가라곤 나보다 두뼘이나 키가 큰 건장한

그 친구의 등을 토닥이며 한참 동안 말없이

산책길을 함께 걷는 것뿐이었다.


그 후 성당에 앉아서도 미세하게 흔들리던

그의 눈빛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처음엔 풋풋한 마음으로 사제의 길을 기쁘게 시작했는데.

대체 무엇이 그를 지치게 만들고 힘들게 한 것일까?


행복해야 하는 곳에서 행복하지 못한 것.

또 내가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도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강요된 상황들이 그에게 부담이 되고.

죄책감으로까지 번져간 게 아닐까?


그리고 이런 마음들이 점점 자라면서

믿음과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하는 것이고

이런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기쁨과 희망을 주지 못하고.

그저 좋은 신부가 되어야 하고.

잘 살아야 한다..고만 가르치는 신학교의 막역한 요구는

그들에게 잔혹하고 무거운 멍에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신학생의 고백을 통해서 나 역시

사랑으로 맺어져야 할 우리 관계에서 앞뒤가 뒤바뀐 채.

사랑보다는 의무와 책임만을 행하고 요구 해 왔던건 아닌가

새롭게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


벌써 대림절이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다시 외친다.

회개하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지난 일 년을 되짚어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남에 대해 평가. 험담. 혹은 충고라는 이름으로

과도한 요구들을 쏟아냈다.


어쩌면 나의 이런 과도한 요구에 주변 사람들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성품이 반듯한 사람이 되거라.

좋은 신부 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는 식의.

남을 향하던 화살표와 어쭙잖은 요구들을

이젠 거둬들이려 한다.


변변히 속 시원한 위안의 말도 해주지 못하고

그저 등만 쓸어주었던 그 신학생이 부디 힘을 냈으면 좋겠다.

있으나 마나 한...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설사 꾸깃꾸깃 구겨서 저 구석에 던져놓더라도.


언제나 어디서나 반짝반짝 빛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가톨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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