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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일반상식과 간단한 교리를 담는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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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열째 계명 :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name 운영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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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째 계명 :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나다움의 길


나다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려

나를 존재케 하셨습니다

 

나다움은 곧

하느님다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닮은 모습으로

나를 지어내셨습니다

 

나다움은 곧

하느님 닮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 하라고

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나다움은 곧

하느님 뜻 이룸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직 당신만을 가지기를

나에게 바라십니다

 

나다움은 곧

하느님만 품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홀로가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나다움은 곧

하느님과 함께함입니다

 

 

‘나’와 ‘나의 것’

 

‘나는 누구인가?’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입니다. 

‘나의 것은 무엇인가?’ 

내 이름, 내 가족, 내 친구, 내 책, 내 옷, 내 직장, 내 집. 

그런대로 대답할 만합니다. 

이 두 물음은 언뜻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물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두 물음을 혼동합니다. 

‘나의 것’을 ‘나’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성장시키는 대신에 

‘나의 것’의 목록을 늘려 가는 데에 집착하게 됩니다. 

‘나의 것’에 집착하여 ‘나의 것’을 얻고자 하는 끝없는 욕망이 ‘탐욕’입니다. 

‘나’와 ‘나의 것’을 혼동하고, ‘나의 것’을 ‘나’라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열째 계명은 탐욕과 세상의 재물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을 금합니다. 

이 계명은 부(富)와 그 힘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발생하는 무절제한 욕망을 금합니다. 

또 이 계명은 이웃의 현세적 재물에 해를 끼치는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고자 하는 욕망도 금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536항).

 

‘나의 것’에 대한 무절제한 탐욕은 ‘나’와 ‘너’의 경계를 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열째 계명은 먼저 “소유 재산의 보호와 인간의 

사적 영역의 보호”(안젤름 그륀, 「인생을 떠받치는 열 개의 기둥」)를 목적으로 하지만, 

우리의 삶에 비추어 좀 더 적극적으로, “재물을 탐내지 마라.” 

곧 ‘나의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해방되어 ‘나’를 추구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다움’을 방해하는 탐욕과 시기심

 

나는 나다워야 하고, 너는 너다워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고유하고 존엄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와 ‘나의 것’을 혼동하여 탐욕의 늪에서 헤맨다면, 

‘나다움’과 ‘너다움’은 빛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너 닮음’을 ‘나다움’과 혼동하게 됩니다.

 

오늘날 돈과 권력, 그리고 사람들 스스로 만든 소비 만능주의라는 

우상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내가 가진 것’과 ‘네가 가진 것’을 끊임없이 비교하라고 부추깁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 부추김에 휘청거리는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여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신과 자신의 것에 감사할 줄 모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으로 가득합니다.

 

따라서 “열째 계명은 인간의 마음에서 시기심을 몰아낼 것을 요구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38항). 

“시기심은 치명적인 악습입니다. 시기심에 빠진 사람은, 

타인의 재산을 볼 때 침울한 마음을 갖고, 그 재산을 옳지 않은 방법으로라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무절제한 욕망을 갖는 사람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39항).

 

 

지금 여기에서 나를 살아요

 

나의 것이 늘어난다고 내가 더 나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처럼 가지고, 다른 사람처럼 된다고 해서 더 나다워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우리는 삶의 필요한 것을 대부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또는 누군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물론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에는 절대 빈곤으로 사지(死地)에 내몰린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이들은 사람들의 이기적인 탐욕이 낳은 희생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우리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탐욕에서 해방되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탐욕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우화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엄청난 재산을 가진 사업가가 머나먼 섬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치열했던 일상에서 벗어난 그는 날마다 바닷가에서 수영이나 낚시를 즐겼는데, 그

때마다 낚시할 생각은 않고 자그마한 배 바닥에 누워 햇볕을 즐기는 한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어느 날 사업가는 놀고 있는 그 원주민이 한심스러워 물었습니다. 

“고기는 안 잡고 왜 그렇게 놀고 있소?” 이에 원주민은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오늘 몫은 넉넉히 잡아 놨어요.” “그래도 더 잡아야 할 것 아니요?” 

“그래서 뭘 하게요?” 원주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사업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사업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지요. 

그 돈으로 더 큰 배를 사면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도 나처럼 큰 부자가 되지 않겠소.” 

사업가는 나름 열심히 원주민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주민은 “그러고는 또 뭘 하죠?”라며 안쓰럽다는 듯 되물었습니다. 

사업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뭘 하긴요, 편안히 앉아 쉬면서 삶을 즐기는 거지요.” 

그러자 원주민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당신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다시 나다움의 길을 걸어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나요?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나요? 존엄한 ‘우리 자신’인가요? 

아니면 이내 사라지고 말 ‘우리의 것’인가요?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나의 것’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너 닮음’이라는 유혹에 맞서 다시 나다움의 길을 걸어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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