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 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예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 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박스를 깔고 웅크린
녹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 처럼.....
- '김수환 추기경님의 기도하는 손' 정호승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