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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4) [요한 복음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1,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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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1,29-34)

 

어릴 적에 반성문을 꽤 많이 썼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소위 ‘갱지’라고 불리는 종이를 몇 묶음이나 사다 놓았는데, 

그 종이 한 장 한 장을 글자로 빼곡이 채우는 것은 어린 나의 몫이었다. 

반성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반성한다고 써내려간 글의 대부분은 “잘못했어요”라는 말로 점철되었다. 

반성문을 쓰면서 든 생각은 줄곧 하나였다. ‘빨리 끝내자’ 그리고 ‘빨리 나가서 놀아야겠다.’ 

이런 나를 어머니는 어떻게 보셨을까? 반성문의 끝은 늘 어머니의 용서였고 

그것은 나의 잘못을 찬찬히 씻어 내는 사랑의 체험이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다가서는 장면에서 나는 지난날의 반성문을 참 많이도 떠올리고 곱씹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례자 요한에게 반성문을 쓰러 오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죄 없는 분이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세례자 요한에게 걸어오시는 것, 

죄에 맞서고 죄를 없애러 오셨기에 스스로 반성문을 쓰러 오시는 게 분명하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표현한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1,29). 요한은 지금 예수님을 해석한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이가 예수님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예수님이라고 규정한다. 

공관 복음에서 볼 수 없는 요한 복음만의 규정이다.

 

유다 전통에서 죄를 없애는 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요한은 지금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신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에는 속죄일이 있어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삶을 영위하고 

존속시키기 위해 반드시 속죄를 해야 했다. 속죄에는 숫염소 두 마리가 필요했다.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주님께 바치고, 죄 지은 자의 죄를 대신 짊어질 

다른 숫염소 한 마리는 광야로 내보냈다. 그것으로 죄 지은 자가 깨끗하게 된다고 믿었다(레위 16,22 참조).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한 요한의 머릿속에는 예수님이 염소처럼 

대속물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었다. 대속물이 하느님이라고 요한은 외치고 있다.

 

어린 양도 매한가지다. 대속물의 논리로 이해할 수 있다. 

이사 53장에 남의 죄를 대신해 죽임을 당하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은 어린 양에 빗대어 등장한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이 침묵하듯, 대신 희생당하는데도 불평하지 않는 종의 모습에 

예수님을 갖다 놓는 것이 요한의 해석이다. 탈출 12장의 제물이 된 양 역시 그러하다. 

자신은 죽어 갔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살린 파스카의 양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요한은 가리킨다. 

사도 바오로는 한 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우리의 파스카 양”(1코린 5,7)이라고 칭한다.

 

염소든 어린 양이든 이스라엘에게 남겨진 기억의 흔적은 온통 희생으로 물들어 있다. 

이건 수동적이고 맹목적이며 슬픈 일이다. 

이렇게 끝나면 하느님 앞에 선 백성은 죄의식에 짓눌려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만나는 설렘보다 하느님에게서 행여 내쳐지지 않을까 조바심에 휩싸여 살아갈 뿐이다. 

지난날의 내 어린 시절처럼 “잘못했어요”라는 말로 반성문만 써놓는 꼴이다. 

반성문을 쓰고 나서 맛있는 간식이나 마음의 평화로 생기를 되찾은 발랄한 

아이를 염소와 어린 양의 대속물로는 만나기 어렵다.

 

예수님이 ‘죄를 없애러 오신 어린양’이라는 말은 알려져야 했다(1,31 참조). 

예전의 속죄와 희생이 새롭게 알려져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만 가득한 대속물이 횡행하는 세상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백성의 회개뿐 아니라 당신과 세상의 만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사실 요한 복음은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5,18-19). 

요한 복음은 우리가 세상을 거슬러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선택하게끔 부추긴다(20,31 참조). 

이 세상에 머물러 자기 죄를 씻는 데만 골몰하는 것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세상에 미련이 많다는 방증이다.

 

오랫동안 대속물을 바쳐 왔으면서도 여전히 죄에 허덕이는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죄를 씻어 내는 데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염소든 어린 양이든 대속물의 자리를 자처하셨다. 

예수님의 대속은 죄를 씻는 데 소용되지 않고 죄를 없애고 하느님을 알리는 데 소용된다. 

이를테면 물로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다른 어떤 것으로 내 죄가 사해진다는 생각은 참으로 이기적이다. 

자신이 깨끗해지기 위해 다른 것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오만한 자기 방어이다. 거기에는 

그 누구도, 심지어 하느님도 끼어들 자리가 없다.

 

어린 시절 반성문 작성은 꽤나 지루하고 어려웠다. 

지금의 나는 반성문을 쓰던 그 시절을 미소 띤 얼굴로 만난다. 

반성하려면 기쁨과 희망을 지향해야 한다. 반성과 기쁨과 희망은 극명한 대비가 아니라 

명징한 인과관계에 놓인다. 죄를 없애고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 

본질은 예수님이지 죄 사함이나 어린 양의 희생이 아니다. 

예수님을 붙잡는 일에 게으르지 말자. 내가 죄인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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