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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7) [요한 복음서]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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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3,1-21)

 

흔히 ‘바리사이’라고 하면 거부감부터 드는 게 우리 신앙인의 습관적 태도다.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우며 예수님의 비난을 온몸으로 받은 대상이 바리사이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지만 예수님 시절에 바리사이는 훌륭했다. 그들은 613개나 되는 율법을 생활의 실천 사항으로 지켰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다. 다만 율법을 어기는 이들에게 보여 준 사정없는

폐쇄성이 예수님의 열린 사랑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은 우리를 불편케 한다.

 

바리사이로서 니코데모는 열려 있었다. 비록 낮이 아닌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조심스러운 면도 있으나,

훗날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실 때 그분을 두둔하고(7,51 참조),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몰약과 침향을 섞어 가져 오기도 했다(19,39 참조).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 종교적 논란 속에서도 예수님을 존경했고,

그분에게서 가르침을 얻고자 한 개방적 인물이었다.

 

니코데모의 태도에서 먼저 짚을 것이 있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경이나 호감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바리사이보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니코데모는 예수님께 말을 건네면서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을 육체적 ·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3,4)

 

니코데모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관점을 전혀 가지지 못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세상 것에만 휘둘려 하늘의 뜻과 가르침을 멀리하는

삶에서 탈피하는 것을 가리킨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질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요엘 3,1-2; 이사 44,3 참조).

말하자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분을 존경하여 그분에게서 가르침을 몇 수 얻은 뒤,

자기 삶을 더욱 갈고 닦아야겠다는 윤리적 의지의 행위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 세상의 사고방식에서 자유로워져 하늘의 큰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에제 36,25-28 참조). 요컨대 기존의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사람과 세상의 변화는 각자의 삶을 갈고 닦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한계와 주관성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이며,

더구나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살이가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혼자 잘 살려 해도 관계가 헝클어지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험을 숱하게 겪지 않는가!

 

유다의 전통에서 사람과 세상의 변화에 대한 열망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 속에서 다듬어져 왔다(다니 7장 참조). 하늘에서 내려온 이는 분명 하늘을 알고 있다.

이 세상만이 아닌 저 높은 하늘의 신비를 알고 있는 존재가 ‘사람의 아들’이다.

세상살이의 한계를 하늘을 통해 직시하고, 하늘을 품어 땅을 변화시키려 했다.

거기에 ‘사람의 아들’만큼 적확한 표현은 없다.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되,

누가 뭐라 해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라는 두 세계가 사람의 아들을 통해

온전히 하나가 된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무르시는 예수님은 유다 사회가 기다리고

열망하던 ‘사람의 아들’ 바로 그분이셨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생명을 위해서다.

생명은 인간 삶의 지속적 영위나 풍요로움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을 만나는 데서 이루어지는 관계 지향적 개념이다.

그래서 생명은 하나의 ‘만남’이고 온전한 의탁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는 것,

인간의 손에 전적으로 자기 목숨을 내어 바치는 것이 십자가였다.

하늘과 땅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바치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그것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나게 하셨다.

마치 저 옛날 목마름과 배고픔, 생명의 위협이 득실대던 광야의 척박함에서

구리 뱀이 등장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내고 그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했듯,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매달려 스스로 죽어 가시되 하늘을 갈망하는

백성이 하늘과 하나로 묶이게 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늘과 땅이 함께 누리는 생명이다.

 

신앙생활은 인간적 삶을 다듬는 데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전복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남들과 똑같은 눈으로 남들과 잘 어울리고, 도사처럼 온유한 미소를 짓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탈피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나만 보고 나의 삶과 사고와 신념에만 집중하는 신앙은, 생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하늘의 신비를 전하는 예수님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스스로 유폐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생명보다 죽음으로

운명 지어진 인간적 삶에 자신을 가두는 행위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표로 삼아 죽음으로써 생명을 기억하고 살아 내는 이가 신앙인이라면,

신앙의 지향점은 오로지 하나다. ‘빛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뿐이다.

내 안에 머물러 어떻게 나를 잘 갈고 닦을지 골몰하기보다 타자에게,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관계 지향적 삶이 생명의 길이고 진리의 길이며 신앙의 길이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통해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인간의 지혜를 떠나

하늘의 열린 생명으로 초대되는 순간을 체험했다.

우리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손과 자기 비움이

예수님을 만나는 데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에서 우리가 기억할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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