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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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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 66- 참 권위와 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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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선하신 이끄심따라
 
인터넷이 가져온 것 가운데 하나가 교회 의사소통 문화의 변화다. 인터넷은 교회의 대화 문화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신자들 간 거리를 좁혀 놓았고, 만나기 힘들던 사제와 신자들의 간격도 한결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답답하고 궁금했던 물음들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인터넷은 잘 활용하기만 하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선교매체가 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인터넷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정의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항의성 내지 고발성 전자우편이 심각한 사생활 침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확대 재생산해 무책임하게 대중에게 공개하는 행위는 거의 범죄행위에 가깝다. 공개자는 익명으로 숨어버리고 피공개자는 벌거벗겨진 채 여론재판을 받게 되는 일은 결코 정의로운 일이라 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근래에 들어 여러 본당에서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본당 내에서 해결할 일을 침소봉대해 외부에 알린다거나 선동성 글을 무분별하게 교구청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은 성숙한 신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피고발자의 인권 역시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어떤 사안이건 그것을 담당자 또는 직권자에게 전할 때는 '친서' 방식이 좋을 것이다. 직접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 편을 들자는 것이 아니라, 신중에 신중을 기하자는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말고 기도하고 보속하는 가운데 일치의 영이신 성령의 중재를 청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지혜는 분열을 조장하지만 하느님의 지혜는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교부(敎父) 오리제네스(185~253)의 호소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죄가 있는 곳에는 다수가 있고, 이교가 있고, 이단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덕이 있는 곳에 일치가 있고 모든 믿는 이들이 한 몸, 한 마음을 이루는 일치가 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817항).


방금 언급한 것을 우리는 다시 '권위'의 관점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참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먼저 권위에 대해서 알아보자. 구약성경에 의하면 한분 하느님만이 유일하고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그분 허락 없이 가질 수 있는 권위란 하나도 없고(1열왕 19,15; 2열왕 8,9-13 참조) 그분의 도전이나 심판을 받지 않는 권위 행사도 없다. 하느님 권위는 법과 계명, 그리고 그분이 파견하신 영도자, 판관들, 예언자들을 통해서 역사(役事)된다. 하느님 일꾼들이 그 파견자로서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받는 권위는 백성에 대한 지배력에서가 아니라 그들을 돌보고 섬기는 데에서 발휘된다.

결국, 하느님 일꾼들에게 참 권위는 가난하고 억울한 자를 돌보아주며 묶인 자들을 해방시켜 주는 데서 발생한다(이사 61,1 이하 참조).

그러나 역사의 흐름과 함께 이 권위는 점점 권위주의로 변질되어 갔다. 사회 구성원의 계급화에 따라 생겨난 권위주의가 참된 권위를 왜곡시키는 현상이 있었다. 사제 계급, 레위인, 율법학자 및 원로들, 중인들, 천민들, 노예들, 사마리아인들로 이어지는 사회 계층 구조는 분명히 권위주의의 발로였다.

구약성경은 참 권위의 존속을 위해 예언자들을 통한 견제가 있었음을 언급한다. 권위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고 바로잡도록 부름받은 이들이 바로 예언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참 권위를 가지고 타파하고자 하신 것도 이 그릇된 권위주의의 폐해였다. 예수님은 참 권위, 권력, 권한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권위주의에 빠져 그릇된 권위를 행사하던 이들에게 질책을 가하고, 권위를 박탈당한 이들에게는 권위를 회복시켜 주셨다.  

예수님은 남다른 권위를 가지고 계셨다. 예수님 권위는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권위였다(요한 3,31-36; 5,19-29 참조). 예수님은 그 권위(또한 권한)를 제자들에게 주셨고(마르 3,15; 마태 10,1; 루카 9,1 참조), 당신이 제자들과 교회에 위임하는 그 권위가 권위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이미 간파하고 계셨다.

교회 공동체는 형제 자매적 공동체로서 모두가 성령의 은사에 따라 각기 고유한 권위를 갖고 공동체에 유기적으로 기여하며 살아간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참 권위의 모범을 따라 서로 섬기고 사랑할 때 하느님의 새 백성으로서 권위가 발휘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5).

그래서 예수는 당신의 절대적인 사제직, 예언직, 왕직의 권위를 베드로에게 위임하실 때 먼저 '사랑'을 확인하셨던 것이다(요한 21,15-19 참조).


이처럼 교회 권위는 하느님 백성을 위한 것이고, 하느님 백성 상호간에 봉사와 사랑이 넘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이 아무 내용도 없이 그저 존경받기만 원하는 권위주의로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루카 20,46).

권위주의는 문제가 있지만 권위는 존중받아야 한다. 권위에 순명하는 것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교회 권위에 순명하는 것은 그 권위를 세운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여기서 말하는 온유가 순명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런 사람은 '땅'을 받는다고 했다. 땅은 구약성경에서 '축복'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주 나온다.

그러므로 권위에 순명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요즈음 세상에 무슨 이런 고리타분한 논리가 있는가?" 하고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오로가 권고한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로마 13,1).

순명은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인간적 판단을 하느님 섭리보다 우선적으로 내세우려는 습성 때문이다. 눈 딱 감고 하느님의 선하신 이끄심을 믿자.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재물로 바쳐라"(창세 22,2) 하시는 모순된 명령에 아브라함은 순명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사악도 살리고 자기 자신의 믿음도 인정받는 선한 결과를 얻었다.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창세 22,12). 이런 것이 바로 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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