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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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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 48- 십계명 속의 보물찾기: 제5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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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문화'를 만들자
 
 
비엔나 대학에서 석사과정에 있을 때 윤리신학 시험을 구두시험으로 치렀다. 그때 교수님에게서 받았던 물음들 가운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아주 재미있는 물음이 하나 있었다.

"지금 당신이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갑자기 한 괴한이 나타나 총기를 들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상황이 악화돼 이미 몇 사람이 희생당했고 분위기가 더욱 위험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당신에게 그를 제거할 기회가 옵니다. 당신은 호신용 총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당신의 사정거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당신의 움직임을 보지 못합니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필자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자를 쏘겠습니다."

 교수님이 다시 물었다. "살인은 제5계명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필자가 대답했다.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동등한 가치가 서로 대치 국면에 있을 때 우선적 선택의 원리를 따를 것을 권장합니다. 곧 생명과 생명이 대립돼 부득이 한쪽을 희생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할 때, 다수의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소수의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는 원리 말입니다. 미치광이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선량한 여러 사람이 산다면 그것은 의로운 행위입니다."

 교수님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어주셨다. 그 때 필자는 '정당방위론'은 피력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질문 의도가 '불가피한 우선 선택의 원리'를 묻고자 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생명과 관련된 사안은 참으로 미묘하다. 때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 상황에 빠뜨리기도 한다. 요즘 세간에 떠들썩한 배아복제 문제도 우리에게 냉철한 식별과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무엇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인가?

 상식 수준의 정보만 가지고는 이 물음에 올바로 답할 수가 없다. 이 물음에 대해 답변할 수 있으려면 정확한 정보와 올바른 가치관이 요구된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어설픈 정보와 혼란스런 가치관으로  여론몰이에 휩쓸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제5계명, "살인하지 말라"(마태 5,21; 탈출 20,13 참조)는 계명을 글자 그대로 알아들으면 상식적 삶을 사는 사람들과는 별로 상관없는 계명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 계명의 본래 의도를 바꿔 표현해 보면 "생명을 존중하라" 또는 "생명을 사랑하라"는 의미가 된다.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제5계명은 우리 일상 삶에 가장 긴밀히 연관돼 있는 계명이라는 말이 된다.

 실로 예수님은 제5계명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던 율법학자들을 겨냥해 그 함의를 밝히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상기시키시며, 여기에 분노와 증오와 복수하는 일까지 금지하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뺨을 내밀 것과, 원수를 사랑할 것을 당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깊은 영성을 끄집어내셨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비약에 가까운 가르침이 가능할까? 이를 성서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명할 수 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됐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

 사람의 생명이 이처럼 '하느님의 모상'을 지녔다는 말은 사람이 절대 불가침의 존엄성을 지녔다는 얘기가 된다. 히브리어에서 '닮았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단어로 '데무트(demut)'와 '셀렘(selem)'이 있다. 데무트는 겉모습만 닮은 것을 의미하고, 셀렘은 안팎이 닮은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모상을 뜻하는 단어로 '셀렘'이 사용됐다. 즉 인간은 하느님을 안팎으로, 다시 말해서 내용과 성질까지 닮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 생명에 하느님의 존재가 함께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생성 시초부터 하느님 창조 행위에 연결되며 또한 모든 생명의 목적이기도 한 창조주와 영원히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그 시작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무죄한 인간의 목숨을 직접 해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2258항).

 사람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은 특히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미약한 생명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태아, 노약자, 장애우 등 모든 나약한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일체의 훼손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취지에서 자살, 안락사 등도 결국은 살인 행위로 간주된다.

 우리가 소홀히 여기기 쉬운 욕설과 폭력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미움도 작은 살인이라 할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5년 반포된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과 2000년 성탄 메시지에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다양한 양태의 '죽음의 문화'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교회가 이에 대항해 '생명의 문화' 창달에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로 카인의 범죄 이후 인류 역사에서 자행된 살인, 전쟁, 집단 학살, 가난, 영양실조, 기아, 낙태, 안락사, 대규모 출산 통제 등 생명 파괴는 첨단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해 마침내 반생명적 행태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비극적 현실에서 다시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생명의 종교이다. 하느님을 생명의 창조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생명의 충만, 영원한 생명의 중재자로, 성령을 모든 생명의 동력(動力)으로 체험하는 것을 핵심 신앙으로 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생명의 외경과 수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부르심이라 할 수 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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